토요강좌 15-충절의 표상, 포은 정몽주
※강좌 당일 현장에서 수강을 원하시는 분들도 참여가 가능합니다.
1517년(중종 12) 성균관 유생들이 “문충공 정몽주는 충효(忠孝)로 큰 절개를 떨쳤고, 그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유학에 공로가 매우 많으니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여 왕께서 윤허하시어 그해 9월 17일에 문묘의 서쪽 건물에서 문창후 최치원의 곁에 배향하게 됩니다. 또 묘소를 수리하고 묘표(墓表)를 세우는 한편 땔나무를 하거나 가축을 키우지 못하도록 하라는 왕명이 있기도 하지요. 그 관직을 써 내려가는데 ‘고려(高麗)’를 쓰지 않고 ‘문충공(文忠公)’이라고 쓴 것은 대개 공(公)이 다른 두 성씨(姓氏)를 섬기지 않았다는 본래의 뜻을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공(公)의 평생과 사적(事蹟)은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위의 글은 500년 전인 1517년,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 앞에 세운 묘표(墓表) 내용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으로, 선생은 우리나라 충절의 대표적인 역사위인이자 경기도 역사문화의 중심인물입니다.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조선 건국에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절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모범이 되었지요.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묘소가 용인시에서 광주시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데, 선죽교에서 암살당한 후에 개성에서 고향인 영천으로 가던 상여가 풍덕천에 이르러 멈추고 가지 않고 관을 덮고 있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현재 묘소의 자리에 떨어져 그곳에 장례하였다는 전설로도 유명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이런 역설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전모에 대해 파헤쳐 보겠습니다.
* 11월 23일(토)의 강좌 주제는 ‘세계무형유산, 아리랑’ 입니다.
● 문의전화 : 031-288-5351(박물관 학예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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