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간
- 2020-08-04(화) ~
- 장소
- 2F 고려·조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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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절요
조선 1453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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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자 새·꽃무늬 의자
고려 1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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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조대장경 화엄경 제1권
고려 11세기 / 국보 제2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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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몽주 초상
조선 16세기 / 보물 제1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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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통4년이 새겨진 분청사기 김명리묘지
조선 1439년 / 보물 제18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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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송언신에게 보내는 선조의 비밀편지
조선 16세기 말 / 보물 제9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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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표암 강세황의 글씨모음
조선 1790년 / 보물 제1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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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강가의 한가로운 풍경
김홍도 / 조선 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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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백자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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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백자용무늬항아리
조선 1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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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궤장과 연회도첩
조선 1668년 / 보물 제9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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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심환지 초상
조선 18세기 후반 / 보물 제14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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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실국가 근본의 땅, 경기
‘국가 근본의 땅’이었던 고려와 조선의 경기 역사와 문화예술, 민속 등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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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경기도의 근현대
개항 이후 경기도의 근현대화 과정을 연표와 다양한 사진 자료를 통해 전시하고 있다.
상설전시
고려·조선실
전시실 2층
고려·조선실
국가 근본의 땅, 경기
‘국가 근본의 땅’이었던 고려와 조선의 경기 역사와 문화예술, 민속 등을 전시하고 있다.
국가근본지지(國家根本之地), 나라의 뿌리가 되는 곳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경기’의 정체성을 드러낸 말입니다. 천년동안 개경(개성)과 한양(서울)이라는 다른 도읍을 가졌던 두 왕조에서 경기는 나라를 지탱하는 뿌리였습니다.
근대화 이후 산업화를 경험하면서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서울로 집중되면서 경기는 서울의 종속변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수도권이란 단어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개경과 한양에서는 사대문 안의 왕성(王城)이 고려와 조선의 도읍이었습니다.
이와 비교하여 근대화 이후 사대문을 벗어나 옛 경기 영역의 일정 지역이 서울의 범위로 포함되었습니다. 고려·조선의 경기와 현재의 경기가 그 개념에서 변화가 있었습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개경과 한양은 나무와 물에, 경기는 뿌리와 샘에 비유되었습니다. 나무와 물은 뿌리와 샘이 없으면 고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기는 개경과 한양에 그런 존재였습니다.
조선 건국을 설계했던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이나 유교국가로서 그 기틀을 마련했던 권근(權近, 1352~1409), 조선 중기 유학자의 전형이었던 이식(李植, 1584~1647) 등은 시로 ‘경기산하(京畿山河)’를 읊었습니다.
조선의 번영을 상징하는 징표가 바로 경기의 발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기는 국왕이 백성들을 대상으로 펼치는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우선 대상이었고, 그 결과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였습니다.
고려와 조선의 경기
현재 서울이 특별시이듯 고려와 조선에서 경기는 지방행정제도와 다른 특별 구역이었습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시작된 고려시대의 경기제도에서 경기는 왕경(王京)인 개경과 함께 왕경개성부에 속하여 5도 양계로 운영되었던 지방제도와 달리, 물론 고려 후기에는 변화가 있었지만,
지금의 국무총리실에 해당하는 상서도성(尙書都省)이라는 부서에 직속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경기 역시 지방제도의 하나로 운영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1414년(태종 14) 실시된 ‘경기’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도(道)의 경우 충청도·경상도·전라도·함경도·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이 그 행정명칭이었지만, 경기는 경기도라고 하지 않고 단지 ‘경기’라고 하였습니다.
도(道)의 정치·군사·행정·경제 등 모든 것을 관장하던 장관인 관찰사 역시 충청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가 정식 직명(職名)이었던데 비해 경기는 경기도관찰사가 아니라 ‘경기관찰사’였습니다.
‘경기’가 도읍과 지방제도 사이에서 특별한 지역이라는 성격을 반영한 것입니다.
천년경기역사문화의 정체성
역사문화적인 측면에서 경기도의 정체성에 대해 “정체성이 없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경기도 문화가 경상도·전라도 등 다른 지역의 뚜렷한 특성에 비해 특징적인 것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녹아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경기의 역사문화적인 특성을 잘 알지 못한데서 나온 푸념에 불과합니다.
현재 전국의 물산과 문화 등은 경기도에 모여 여기에서 재생산되어 다시 곳곳으로 재분배되고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려와 조선의 경기는 사통팔달의 지역이었습니다. 두 왕조의 문화는 경기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했습니다.
천년의 경기문화는 우리역사문화의 원형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경기도에 다문화가정이 많듯이 고려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발해·거란·여진 유민들의 집단적인 귀화를 비롯하여 송·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려에 들어와 살았습니다. 고려 인구의 약 15% 내외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양주에 거란 귀화인들의 마을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경기 주변에 모여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고려의 문화를 융합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에서 표류 및 전쟁 등을 통해 간혹 들어오는 서양인이나 일본인들도 경기에 살며 조선의 문화에 적응했습니다. 이 같은 사회 환경은 경기역사문화의 정체성을 만들어냈습니다. 다양성·포용성·개혁성·역동성이 그것입니다.
경기도박물관에서 풀어가는 천년 경기역사문화의 이야기
경기도박물관에서는 1996년 개관 이후 25년만에 전시실을 리뉴얼하면서 앞서 살았던 경기인(京畿人)들의 이런 이야기를 현재의 경기도사람들에게 보여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여기가 경기!’라는 슬로건에는 경기도박물관에 오면 천년 경기역사문화에 대한 정수를 볼 수 있다는 우리의 다짐을 담았습니다.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① 천하의 중심 고려, 고려의 중심 경기 ② ‘코리아’의 시작 ③ 새로움이 시작된 곳 ④ 고려인(高麗人)의 삶 ⑤ 또 다른 출발”,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① 경기, 나라의 근본 ② 천혜의 요새 ③ 개혁의 중심 ④ 경기에 모이다”로 그 내용을 꾸몄고,
‘경기 사대부’들의 예술적인 측면을 보다 깊숙하게 들여다보려고 “① 조선의 문화를 이끌다 ② 예술로 꽃피우다 ③ 경기인(京畿人)을 만나다”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